20세기 초 파리에서 로댕에게 배운, 일본에 근대조각의 예술성을 심어준 천재조각가・오기하라 모리에를 기리는 미술관입니다. 이 지역의 시민과 학생30만명의 기부에 의하여 1958년에 개관하였습니다. 건물은 오기하라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성장한 것을 상징한 교회풍의 디자인이며, 단풍의 시기를 비롯해 사계절 각각의 그 자체가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습니다.
관내에서는 오기하라 모리에의 예술, 그 밖의 건물에서는 그의 친구와 그의 계보의 예술가의 소개에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오기하라 모리에(로쿠잔) 연보
1879년 12월 1일, 현재의 아즈미노시 호타카의 농가에서 5남으로 태어남. 화가를 지망하여 상경(1899년), 도미(渡美)(1901년), 도불(渡佛)(1903년). 파리에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에 충격을 받아 회화에서 조각으로 전향. 뉴욕으로 돌아와 학비를 벌면서 연구를 거듭한다. 1906년 파리로 돌아와 아카데미・ 주리안에서 본격적으로 조각을 연구. 1907년 로댕을 자주 방문하여 가르침을 받는다. 파리 시대의 작품으로 “갱부” “여인의 몸”이 남아 있다.또한 이 무렵부터 “로쿠잔(碌山) ”이라는 호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1907년 12월 귀국길에 오른다. 일찍부터 동경하던 곳이었였던 이탈리아, 그리스, 이집트를 경유해서 1908년 3월 귀국. 같은 해 6월 신주쿠에서 아틀리에를 차리고 제작을 시작한다. 작품 제작과 논설을 통해서 “생명의 예술”을 설파. “호조 도라키치상(像)” “여인(女)” 를 제작하기도, 1910년 4월 22일 30세로 급서. 그 때문에 남아 있는 작품은 적고, 현존하는 것은 15점뿐. “여인(女)”와 “호조 도라키치상(像)”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일본 근대 조각에서 중요문화재 작품은 6점 뿐). 로댕 등으로부터 흡수한 서양의 움직임과 함께 동양의 정감 (静感)을 의식한 조각을 남겼다. 오기하라가 제시한 진실한 예술에 감동받은 예술가들이 뒤를 잇고 있다.
“갱부”1907년
일본에 근대 조각의 문을 열었던 작품. 내부에서 강한 힘이 넘쳐 흘러 확고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 조각이라는 것의 매력의 하나가 덩어리로서의 아름다움에 있음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해준다.
”호조 도라키치상(像)”1909년 중요문화재
머리 부분의 점토를 다루는 것에 주목하면 “갱부”의 제작부터 겨우 2년 사이에 상당히 고밀도의 점토를 다루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약간 얼굴을 왼쪽으로 돌리는 것에 의해 생겨나는 공간 구성이 뛰어나다. 머리부분과 의복의 점토를 다루는 콘트라스트도 매력의 하나다.
“여인(女)”1910년 중요문화재
일본 근대 조각의 최고 걸작. 근대 조각으로서 처음으로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작품을 관철하는 나선상의 상승하는 것 같은 움직임이 매력. 이루워질 수 없는 연모의 끝에 다다른 오기하라의 개인적인 심경이 보편성 있는 표현으로 승화되어 있다. 오기하라의 말 “Love is Art, Struggle is beauty”를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