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년 12월 1일, 현재의 아즈미노시 호타카의 농가에서 5남으로 태어남.
화가를 지망하여 상경(1899년), 도미(渡美)(1901년), 도불(渡佛)(1903년).
파리에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에 충격을 받아 회화에서 조각으로 전향. 뉴욕으로 돌아와 학비를 벌면서 연구를 거듭한다.
1906년 파리로 돌아와 아카데미・ 주리안에서 본격적으로 조각을 연구. 1907년 로댕을 자주 방문하여 가르침을 받는다. 파리 시대의 작품으로 “갱부” “여인의 몸”이 남아 있다.또한 이 무렵부터 “로쿠잔(碌山) ”이라는 호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1907년 12월 귀국길에 오른다. 일찍부터 동경하던 곳이었였던 이탈리아, 그리스, 이집트를 경유해서 1908년 3월 귀국. 같은 해 6월 신주쿠에서 아틀리에를 차리고 제작을 시작한다.
작품 제작과 논설을 통해서 “생명의 예술”을 설파. “호조 도라키치상(像)” “여인(女)” 를 제작하기도, 1910년 4월 22일 30세로 급서.
그 때문에 남아 있는 작품은 적고, 현존하는 것은 15점뿐. “여인(女)”와 “호조 도라키치상(像)”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일본 근대 조각에서 중요문화재 작품은 6점 뿐). 로댕 등으로부터 흡수한 서양의 움직임과 함께 동양의 정감 (静感)을 의식한 조각을 남겼다. 오기하라가 제시한 진실한 예술에 감동받은 예술가들이 뒤를 잇고 있다.